1873년 친정에 나선 고종 또한 성곽의 수보를 이어나갔다. 1890년에 교동읍성이
자금과 이유가 없었기에 차라리 훼철하고자 하였다. 또한 정부에서 일부러 헐지 않더 라도 주민들이 집터를 늘리거나, 집의 받침돌, 디딤돌로도 가져가는 경우가 있었다. 43)
제3절 도성·읍성 훼철에 대한 입장
한국정부는 성곽을 꾸준히 보존하려 하는 모습을 보였다.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성곽의 보수공사 및 신축이 이루어졌다. 우선 1863년에 진해읍성이 신축되었으며, 1869
년에 서울 동대문을 중건하고 충주읍성을 수축하였다. 1870년에는 홍주읍성과 대구읍 성이 수축되었다. 이처럼 성곽의 보수공사나 신축이 이루어진 것은 성곽을 여전히 군사시설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4)
1873년 친정에 나선 고종 또한 성곽의 수보를 이어나갔다. 1890년에 교동읍성이 수축되었고, 1894년에는 남대문 동쪽 성벽을 개축하였다. 45) 1896년에는 홍주읍성을 수리 하고, 46) 1897년 3월에는 함양군 성벽을 수축하였다. 47) 1900년 4월에 서울에서 서대문 종로청량리 간에 전기궤도가 개통됐을 때도, 성벽을 파괴하지 않고 너비 5m, 높이 4.8m밖에 되지 않는 누문(樓門)안으로 지나게 했다. 1902년에는 남대문과 돈의문의 쇠퇴한 성벽도 보수했다. 48) 또한 1906년에는 전라북도관찰사가 전주 성벽이 무너졌다며 새로운 길을 만들자고 요청하자, 내부에서 무너진 성벽을 수축할 방법은 생각하지 않
고 새로운 길을 만들 생각을 하는 것은 ‘탄식’할 일이라고 했다. 49) 이와 같이 한국정 부는 성곽의 보수공사를 꾸준히 해왔으며, 무너진 성벽을 개수하지 않고 허물어서 도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에도막부(江戶幕府)를 대신하여 일본을 통치 하게 된 메이지정부가 1871년 7월 폐번치현(廃藩置県)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 정부가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에도시대 봉건권력의 상징이었던 성곽도 메이지정 부의 관할이 되었다. 1873년 1월 메이지정부는 전국의 성곽 정리를 결정하였는데, 나고야성(名古屋城), 니조성(二條城) 등은 황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남겨두었다.
42) 城門毁撤」, 帝國新聞, 1906년 10월 19일.
43) 그 외에 동림진은 경의철도의 개축이 이유였다.
44) 오타 히데하루, 2003, 앞의 논문, 196∼197쪽.
45)公文編案제6책, 奎18154(군무아문→탁지아문).
46)公文編案제61책, 奎18154(충청도관찰사 이건하→탁지부).
47)通牒제1책, 奎17891(사계국장 유정수→사세국장 이해만).
48) 오타 히데하루, 2003, 앞의 논문, 199쪽.
49) 論指全察 ,帝國新聞, 1906년 5월 30일; 毀城良䇿,皇城新聞, 1906년 5월 30일; 毀堞 非策 ,大韓每日申報, 1906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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